아름다운 우리 강산/서울시

법정스님께서 입적한 길상사

blue violet 2013. 9. 21. 20:06

온전하게 '무소유'와 '명상'을 할 수 있는 길상사에 가다. (2013년 9월 18일)

 

북악산을 넘어 성북동 끝자락 주택가에 나타나는 길상사. 이곳은 법정 스님과의 연으로 잘 알려진 사찰이다. 강원도 평창의 산골 오두막에서 기거하던 법정 스님은 1년에 몇 번씩 길상사에 들러 법문을 설파했고, 2010년 3월 생의 마지막 순간을 이곳에서 맞이하셨다.

원래 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 주인이었던 김영한 씨가 법정 스님에게 시주해 창건된 절인데. 김영한 씨는 스님의 대표작인 '무소유'에 깊은 감명을 받아, 대원각 부지를 의탁하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법정 스님은 그 뜻을 받아들이지 않으셨고, 10여 년 간 요청한 끝에 1997년에야 도량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래서 길상사는 가람 대부분 대원각으로 사용되던 때 지어져, 사원 배치가 일반 사찰과는 사뭇 다르다. 일주문을 통과하면 바로 본당인 극락전이 있고, 그 른쪽에 범종각이 있다. 범종각 아래에는 가녀린 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일주문      

   

 

 

 

 

 

 

 

 

 

일주문을 들어서자 꽃무릇이 이렇게 활짝 피어 있었다.  전에도 길상사를 여러 번 다녀갔지만, 화사하게 꽃무릇이 핀 것은 처음 본다. 공연히 마음이 설렌다.

 

 

 

 

 

 

 

 

 

 

 

 

 

 

 

 

법정 스님이 '대원각 시주'를 받아들인 것은 스님이 강원도 오두막에 계실 때 ‘맑고 향기롭게’라는 모임을 발족시킨 것과 관련이 있다. “삭막하고 살벌한 현실에 향기로운 마음의 연꽃을 피워보자”는 취지의 시민운동으로, 1994년 3월 출범한 모임은 소리 없이 번져나갔고, 전국 각계에서 ‘맑고 향기롭게’ 운동에 동참하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회원들은 모일 장소조차 없어 이 절 저 절을 전전했다.

그러자 주변에서 김영한 씨의 청을 받아들이라고 간청하게 되었고, 마침내 법정 스님은 대원각 시주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1997년 12월 14일 마침내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가 개원했고, 법정 스님께서는 개원식에서 길상사는 가난한 절이면서도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되었으면 한다는 말씀과 불자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부담 없이 드나들며 마음의 평안과 삶의 지혜를 나눌 수 있는 사찰이길 바란다는 말씀을 하셨다.  

법정 스님도 지상에서 마지막 밤을 길상사에서 보냈다. 스님은 한 번도 길상사에서는 자신의 몸을 뉘지 않고, 법문이 있는 날에도 법회를 마치면 곧장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런데 투병 중일 때 떠날 때가 된 것 같다며 길상사로 옮겨달라고 하셔서, 이곳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입적했다.

 

 

극락전   

           

 

 

                             범종각  

            

 

 

 

 

 

 

 

 

 

관음보살상 천주교 신자인 조각가의 작품으로 가녀린 모습으로 서 있다. 조각가가 천주교 신자라서인지, 얼핏 보기엔 성당의 성모상과 인상이 비슷하다. 종교간 화해의 염원이 담긴 관음상.

 

 

 

 

 

 

 

 

 

 

 

 

                                         

 

 

 

 

 

 

 

 

 

 

 

 

 

 

 

 

 

 

 

                                         

 

 

 

         

 

 

 

 

 

 

 

 

 

 

 

 

 

 

 

 

 

 

 

 

 

 

 

 

 

 

 

 

 

 

 

 

 

 

 

 

 

 

 

 

 

 

 길상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요정이었던 대원각 주인이었던 김영한(1916∼1999)은 서울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집안이 몰락해 가장역할을 해야만 했고, 권번에 들어가 ‘진향’이란 기명을 받아 활동했다. 스무 살 되던 해 그녀의 뛰어난 재주를 아까워하던 사람들의 지원을 받아 일본 유학길에 올랐지만, 지원하던 사람이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투옥되자 2년 만에 학업을 중단하고 함흥으로 돌아왔다.  

함흥에서 그녀는 백석 시인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졌고, 백석은 진향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 불렀다. 둘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백석 부모의 반대로 자야와 혼인할 수 없었고, 1939년 백석은 혼자 만주로 떠났다. 해방을 맞아 백석이 신의주로 돌아왔지만, 전쟁으로 인해 결국 남과 북에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서로 헤어져 살면서도 자야는 매년 백석의 생일이면 하루 동안 곡기를 끊고 방안에 앉아 불경을 외우며 그를 기렸다고 한다.

자야는 성북동 배밭골 일대에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열었고, 그 당시 이곳은 제3공화국 정권실세들의 단골요정이었다. 수억 원을 쾌척해 백석문학상을 제정, 문학도를 지원하기도 했다. 재물을 많이 얻고, 여러 가지 일을 하였지만 자야는 백석을 향한 그리운 마음을 다스릴 수 없었나 보다. 그녀는 대원각을 시주하였고, 법정 스님은 길상사 개원을 할 때 김영한에게 길상화라는 법명을 내려주었다. 그녀는 1999년 첫눈이 오는 날 사망하여, 모든 한을 내려 놓고 길상사 뒤쪽 언덕에 한줌 재로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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