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청한 오후에 창덕궁을 가다. (2012년 3월 25일)
날씨가 화창하여 북한산으로 갈까 하다가, 오전에 늦장부려 점심을 먹고 나서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창덕궁으로 갔다.
아직 찬기운이 감도는 궁궐 안, 외국관광객들과 가족끼리 또 연인끼리 손잡고 궁궐에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오늘은 후원까지 돌아볼 요량으로 8,000원짜리 티켓을 샀다.
돈화문-보물 383호
창덕궁의 정문, 1412년(태종12년)에 지어졌다. 지금 돈화문은 1609년(광해군 원년)에 다시 지어졌다. 현재 남아있는 궁궐의 정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궁궐 밖에서 보는 돈화문.
궁궐 안에서 바라보는 돈화문 밖의 모습...
금천교를 지나 진선문으로 가는 길
인정문-보물 813호
임금님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던 곳.
연산군, 효종, 헌종, 숙종, 영조, 순종, 철종, 그리고 고종 임금이 즉위하였다.
인정전-국보 225호
창덕궁의 정전으로 즉위식뿐만 아니라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들의 접견 국가 중요행사가 행해진 궁궐의 대표적인 공간이다.
선정문
선정전(보물 제814호)
유일한 청기와 팔작지붕의 형태로 지어졌다.
조선시대 국왕들이 평상시에 거처하던 곳, 궁에서 유일하게 복도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선정전의 왕좌
대조전(보물816호)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왕비의 침전과 왕의 침전으로 나뉘어 있다. 대조전은 용마루가 없는데, 이는 용으로 비교되는 임금이 잠자는 곳에 또다른 용을 나타내는 용마루가 있으면 두 용이 충돌한다 하여 설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1917년 불타자, 1920년 경복궁의 교태전을 옮겨 지었다고 한다.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이 곳에서 승하하셨다.
경훈각
대조전 옆에 연결된 경훈각은 창경궁의 전각. 원래는 2층 건물로 1층을 광세전, 2층을 징광루라고 불렀는데, 후에 1917년 대화재 이후 단층 건물로 재건했다.
희정당(보물 815호)
임금의 침실이 딸린 편전이었는데, 나중에는 어전회의실로 사용하였다. 왕의 연구실인 숭문당이었는데 연산군 때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7년 화재로 소실되어 1920년 경복궁의 강녕전을 이건하였는데, 원래 모습과 완전히 다르다. 내부 응접실에는 서양식 가구가 놓여져 있다.
성정각 일원
왕세자의 거처인 동궁이었다. 순조의 장남인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때 주로 기거하던 정궁이다.
숙장문
궐내각사
궁궐 안에 괸원들이 근무하던 공간으로 정치를 보좌하던 홍문관, 건강을 보살피는 내의원, 정신문화를 담당하는 규장각, 고사를 보관하던 예문관 등이 있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5대 궁궐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1392년)하고, 수도를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옮긴 뒤 제일 먼저 종묘와 사직, 경복궁을 세웠다(1394년). 그 이후 3대 태종 때(1405년) 경복궁의 동쪽에 창덕궁을 창건했다. 정궁 경복궁에 이어 창덕궁이 창건되며 양궐 체제가 확립되었다.
임금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많은 임금들이 창덕궁에서 거처하면서 식구들도 늘어, 성종 때 이르러서 대비를 위해서 창경궁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창경궁은 원래 수강궁(세종대왕이 상왕 아버지 태종을 위해 지은 곳)이라는 곳에 몇 개의 건물을 더 만들어 붙여진 이름이었다. 창경궁은 창덕궁 옆에 위치하여 창덕궁의 부속 역할을 많이 하였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고, 일 년이 지난 뒤 선조는 창덕궁을 재건하였다.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 때 다시 지어져서 마지막 황제에 이르기까지 270여 년 간, 정궁의 역할을 하고 창경궁은 1616년에 복원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 창경궁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을 개설하여 일반인에게 관람하게 하면서 격하시켜 '창경원'이라 부르게 하였다.
조선의 고궁은 국가의 흥망성쇠에 따라 그 운명을 같이 해온 우리 역사의 동반자, 시대가 변하여 차차 원래의 모습으로 보수, 복원되어가고 있지만 지나온 그 역사는 궁궐 건물의 공간 안에 현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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