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우리 강산/경기도

남한산성-서문

blue violet 2012. 5. 6. 01:23

남한산성 서문 ((2012년 5월 5일)

서문은 산성 북동쪽에 있는 문으로 다른 이름으로는 우익문(右翼門)이라 한다. 광나루나 송파나루에서 가장 가깝지만, 경사가 급하여 당시 물자를 수송하던 우마차 등은 이 문으로 드나들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조가 세자 등과 함께 청나라에 항복하러 삼전도로 나갈 때, 이 문을 지났다고 한다.

 

 

 

 

 

 

 

 

 

 

 

 

 

 

 

 

 

 

 

 

 

 

 

 

 

 

 

 

 

수어장대(守禦將臺)-경기도유형문화재 제1호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815-1에 위치해 있고, 1972.05.04 유형문화재로 지정. 조선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만들어진 4개의 장대 중 하나.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쌓는 대를 말한다. 수어장대는 산성 안에서 최고봉인 일장산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어, 성 내부와 인근 주변까지 바라볼 수 있다. 수어장대는 병자호란 (1636) 때 인조(재위 1623∼1649)가 직접 군사를 지휘해 청나라 태종의 군대와 45일간 대항하여 싸운 곳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1층 누각으로 짓고 서장대라 불렀으나, 영조 27년(1751)의 명령으로 서장대 위에 2층 누각을 지었다. 외부 편액은 수어장대(守禦將臺),내부편액은 무망루(無忘樓)라 이름하였다. 현 건물은 고종 건양 원년(1896) 유수 박기수가 개건하였다. 조선 인조 2년(1624)에 남한산성 축성과 함께 축조된 동, 서, 남, 북의 4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장대로 산성내 최고봉인 일장산정  해발 453m에 위치하고 있어 성내와 인근의 양주, 양평, 용인, 고양 및 서울, 인천 까지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무망루

무망루’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아들 효종이 청나라에 대한 복수로 북쪽 땅을 정벌하려다 실패하고 죽은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 그 후 영조, 정조가  효종의 능소인 여주 영릉에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 장대에 들러 하룻밤을 지내면서 병자호란 때의 치욕사를 되새겼다고 전해진다.   

 

 

 

 

 

 

청량당(淸凉堂)

경기도유형문화재 제3호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815-2에 위치하고, 1972.05.04 유형문화재로 지정. 이회와 그의 부인 그리고 벽암대사를 모신 사당. 조선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동남쪽의 공사를 맡았던 이회는 기한 내에 공사를 마치지 못하게 되자 공사비를 탕진하고 공사에도 힘쓰지 않아 기일 내에 끝내지 못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그의 부인도 남편의 성 쌓는 일을 돕기 위해 자금을 마련하여 오던 중에 남편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강에 빠져 자살하였다.

그 뒤에 이회가 쌓은 남쪽 성벽이 다른 성벽보다도 더 튼튼하고 완벽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의 무죄가 밝혀지자 그의 넋을 달래기 위해 사당을 지었다고 한다. 이회의 초상화, 그 양옆으로 처첩과 벽암대사의 영정이 있다고 하는데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볼 수가 없었다.

 

 

 

 

 

 

 

 

 

                         바람이 얼마나 불던지, 단풍나무 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봄바람을 드셌다.

 

 

 

 

 

 

 

 

 

 

 

                         영춘정               

 

 

 

 

오늘 산행 들머리였던 남문으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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